NOX · EPISODE 02
백작의 신부
발레리우스 백작은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낮에는 지병을 핑계로 성문을 닫고, 해가 진 뒤에만 귀족과 상인들을 불러들였다.
몰락한 가문의 땅을 사들이고 흉년이 든 영지에는 곡식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오래된 귀족들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백작은 서쪽의 유서 깊은 가문에 혼담을 넣었다.
그 가문의 딸 세실리아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의심스러운 출신도, 밤에만 모습을 보이는 기묘한 생활도
모두 귀족의 특색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상대 가문은 혼담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진짜 딸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세실리아와 나이가 비슷한 하녀 마리를 골랐다.
몇 달 동안 가문의 역사와 친척들의 이름을 외우게 하고
걷는 법과 앉는 법, 식사 예절을 가르쳤다.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마리는
누가 보아도 귀하게 자란 영애처럼 보였다.
발레리우스 백작은 그녀를 정중하게 맞았다.
직접 고른 꽃으로 방을 채우고, 식사 때마다 곁에 앉았지만 자신은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연 것은 녹스였다.
마리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처럼 편안한 얼굴로 녀석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작의 표정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마리는 자신이 정말 세실리아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에 밴 습관까지 귀족으로 꾸밀 수는 없었다.
엎어진 잔 앞에서 천을 찾고, 무거운 쟁반을 든 시종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떨어진 장갑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뒤늦게 손을 멈췄다.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 그는 포도주 잔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렸다.
잔이 깨지기도 전에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을 집어 들고 백작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세실리아 영애.
귀족의 딸은 남이 떨어뜨린 잔 앞에
무릎을 꿇지 않소.
이름이 무엇이지?
세실리아입니다.
아니..
진짜 이름.
마리……입니다.
그들이 보낸 것은 신부가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나를 짐승이라 여겼군.
백작의 눈에서 인간의 빛이 사라졌다. 입술 사이로 길고 흰 송곳니가 드러났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부디…….
사과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발레리우스는 마리를 붙잡고 목을 물었다.
분노가 가라앉았을 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마리를 마차에 태워 돌려보냈다.
해가 완전히 진 뒤, 닫힌 마차가 서쪽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 문을 열었을 때 마리는 혼자 똑바로 앉아 있었다.
가문의 사람들은 창백해진 마리를
응접실 한가운데 세워놓고 추궁했다.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작게 웃을 뿐이었다.
마리는 대답 대신 웃었다.
웃기만 하는 마리의 행동이 장남이 참지 못하고 마리에게 다가갔다
이게 진짜 미쳤나!
마리의 웃음이 뚝 멎었다.
우드득.
누구도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마리는 장남에게 달려들었다.
장남이 움켜쥔 머리카락이 마리의 두피에서 한꺼번에 뜯겨 나갔다.
우당탕!
으…… 으아악!
물었어! 이년이 물었다고!!!
누가 이년 좀 떼어내!
남자들과 하인들이 팔과 어깨를 붙잡고 마리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가느다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자 이내 한 사람씩 손을 놓았다.
마침내 발버둥 치던 장남의 움직임이 멈췄다.
방안에는 그저 피를 빠는 소리만
소름끼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아아…….
잠시 뒤 마리는 장남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창문으로 다가갔다.